신계리 화계(花溪)
지금으로부터 약 450년 전에 고성김씨가 이곳에 이주하여 사다리 방죽 위쪽에 터를 잡고 살았다. 농경지가 넓고 수리가 용이하여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제법 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. 이곳은 함평읍 성남리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으며 시내(엄다천) 양편에는 아름다운 들꽃이 무성하여 꽃내라 불렀던 곳이고 현재 부르고 있는 화계는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고쳐 부르게 된 이름이다. 당초에 터를 잡은 곳은 사다리 방죽 위쪽이었으나 어느 해 큰 가뭄이 들어 물이마른 방죽에서 귀가 달린 큰 가물치(승천을 기다리던 이무기로서 마을의 수호신이었음)를 잡아 동내 사람들이 끓여 먹은 후 이유 없이 하나 둘씩 죽어가고 동내에 우환이 그치지 않으므로 방죽을 피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였다. 그 후 마을 주변에 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침으로서 마귀의 출입을 금하였다하며 현재에도 마을 뒤쪽에는 그때 심은 노거수가 남아있다.
신계리 장동(壯洞)
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에 광산김씨 2세대가 처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. 그 후 10년 후에 전주리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어 오다 현재는 7개 성씨가 아담하고 조용한 농촌 마을을 이루고 있다. 지명유래는 전하여지는 말이 없어 알 길이 없다.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목포부 신노면이었고 마을 일부가 함평읍 성남리로 편입되었다.
신계리 생곡(生谷)
장동마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형성에 대한 것은 전해오는 말이 없다. 고려시대 때 선비들이 활을 쏘며 즐기던 곳이라 하여 "사장촌(射場村)"이라 불려져 왔으나 해방 후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라 하여 "생곡"이라 하였다.
신계리 우평(牛平)
조선조 성종 때인 1550년경 병조참의를 지낸 고성김씨 김익경이 무안에서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한 이래 그 후손들이 주종을 이루며 현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.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의 형세가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"우평(牛坪)"이라 했으며 지금은 우평(牛平)으로 쓰고 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