성천리 성암(星岩)
나주정씨가 이 마을에 정착한 이래 10대(약 250여년)에 이르고 있으며 여러 성씨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. 마을 뒤에 있는 칠성봉 지명에서 성(星)자와 마을 앞에 게바위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바위암자(岩)를 따서 "성암(星岩)"이라고 했다 하고도 하며 또 하늘에서 별바위(별똥)가 떨어졌기 때문에 성암이라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.
성천리 와촌(瓦村)
마을 앞과 뒤에 팽나무 세 그루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구전에 의하면 고성이씨가 마을 터를 잡고 농사와 토기와를 구우며 살았다고 하나 현재는 거주하지 않고 있다.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을 지낸 이천서씨 경춘(景春)이 낙향하여 이곳에 정착한 이래 현재 14대를 내려오면서 서씨촌을 이루고 있다. 마을 뒤로 병풍처럼 칠성봉이 둘러 있고 주봉인 천자봉 밑에 용바위가 있어 처음에는 "용암(龍岩,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전 지명)"이라고 하였으나 그 후 이곳에서 토기와를 만들게 되어 남쪽은 용암, 북쪽은 와촌(瓦村)이라고 불러 오다가 현재는 와촌으로 통일하여 부른다.
성천리 용동(龍洞)
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인 1703년 영성정씨 묘제가 영광 묘량에서 이곳에 정착하여 현재 12대에 이르고 있으며 영성정씨촌을 이루고 있다. 마을 뒷산이 용이 솟아오르는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처음에는 용흥동(龍興洞, 1914년 행정구역개편전 지명)이라고 불러 오다가 지금은 "용동(龍洞)"이라고 한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