장교리 산음(山陰)
![장교리 산음](/home/hampyeong/images/sub/c18_01.jpg)
풍수지리학상 현재의 산음은 가야금의 몸통이라 하여 금동골이었다. 이 금동골은 구전해오면서 금동굴, 금덩굴로 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후에 공식명을 산음(山陰)으로 표기했는데(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도 山陰으로 표기됨) 마을 바로 앞에 있는 산 그림자에 가려 해가 늦게 뜬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. 원래 이 마을은 경주이씨 대운(大運)이 1680년경에 개촌 했으나 풍수지리학상 이 마을이 경주이씨 터가 아니라하여 이웃 칠언으로 이거하였고 이어 함평이씨 유신(儒臣 1705~1752)이 1720년경에 이거 정착했으며 그 뒤를 이어 정성화(鄭成和)가 입촌 했는데 그 후손은 현재 한 집도 살지 않는다. 그 뒤를 이어 120년 전에 진주강씨 병운(炳運), 평산신씨 경국(敬國), 광산김씨 행서(行西)가 입촌 했고 90년전에 도강(道康김)씨 제옥(濟玉)이 들어와 살았다.
장교리 칠언(七彦)
![장교리 칠언](/home/hampyeong/images/sub/c18_02.jpg)
현재의 칠언(七彦)은 원래는 가야금 일곱줄이란 뜻의 칠현(七絃)이었는데 후에 칠현(七賢 1789 호구총수 지명)으로 바뀌고 다시 "칠현(七玄)"으로 표기되다가(1914년 행정구역명) 근래에는 "칠언(七彦)"으로 쓰이고 있다. 칠언은 경주이씨의 자작일촌이나 다름이 없는데 경주이씨 중 이 마을에 처음 입촌 한 사람은 대운(大運)이며 입촌 연대는 1690년경이다. 현재 그 후손이 23호가 살고 있으며 다른 성씨는 6호가 있다.
장교리 월봉(月峰)
![장교리 월봉](/home/hampyeong/images/sub/c18_03.jpg)
원래 기성면(箕城面)에 속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장교리에 편입되었고 마을의 형국이 달의 형국이라서 "월봉(月峰)"이라 하였다고 한다. 현재는 전의 장동(長洞)마을 까지를 합해 월봉이라 한다. 1789년 호구 총수의 지명에 월봉마을이 없는 것을 보면 그 이후에 형성된 마을임을 알 수 있는데 입향조의 내력에서 여실히 이를 증명한다. 이 마을의 개촌자는 전주리씨 량(樑 1798~1858)으로 1810년경 신광면에서 이거 정착하였으며 이어 경주이씨 집호(集鎬 1864년생?)가 1870년경에 칠언에서 이주 정착한 후 187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. 경주이씨 족보에 집호의 생년이 1864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20대에 문과 급제했다는 전언에 비추어볼 때 1854년(甲寅)생이 갑자(甲子 1864)생으로 잘못 오기된 듯 하다.
장교리 자명(自明)
![장교리 자명](/home/hampyeong/images/sub/c18_04.jpg)
약 200년 전 신흥터에서 광산김씨가 살면서 마을 이름을 아들 자(子)와 울명(鳴)에서 따와 "자명(子鳴)"이라고 부르며 살다, 약 120년 전에 본 마을로 옮겨와 김해김씨, 광산김씨, 경주김씨 등 20여 세대가 살았다 한다. 마을 동쪽에는 장터골이 있는데 장터(닭우리)에서 닭이 자시에 울면 마을이 좋지 않다고 해서 스스로 자(自)와 밝을 명(明)을 써 "자명동(自明洞)"이라고 마을 이름을 고쳤다 한다. 현 무안군과 함평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