옥산리 흥룡(興龍)
![옥산리 흥룡](/home/hampyeong/images/sub/c19_01.jpg)
마을 형국이 용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모양 같다 하여 마을 이름을 "흥룡(興龍)"이라 했다고 하나 용촌의 원명(原名)인 용촌( 村)과 관련지어 방앗간이 흥하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이름인 듯싶다. 이 마을에는 선조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를 지낸 박응주(朴 柱)가 1581년(선조14년)에 아들 대봉(大鳳), 대린(大麟) 형제를 데리고 이주 정착하였고 현재도 그 후손이 주종을 이루며 살고 있다. 대봉의 7대손 우성이가 식목한 소나무 2그루가 현재 당산나무로 마을을 지키고 있는데 둘레는 5m가 넘는다.
옥산리 가작(佳作)
![옥산리 가작](/home/hampyeong/images/sub/c19_02.jpg)
이 마을은 흥룡에 입촌한 박응주(朴 柱)의 6대손이 마을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부친 박천응(朴天 )이 돌아가시자 효성이 지극한 2남 박영원(朴永源)은 장례 후 무덤 옆에 오두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(侍墓)를 하며 살았기에 "天性至孝親"이라 하여 마을 입구에 효자각을 세우고 현재까지 보호하고 있다.
옥산리 옥산동(玉山洞)
![옥산리 옥산동](/home/hampyeong/images/sub/c19_03.jpg)
옛날에는 마을 앞에 연방죽이 있어서 "방죽안"이라 불렀으며 동쪽 300m 지점에 옥녀봉(玉女峯)이 자리 잡고 있어서 "옥산동(玉山洞)"이라고 부르기도 한다. 이 마을은 김해김씨 문경공파 파조(派祖)의 9대손인 대기(大器)가 중종 29년(1534년)에 입촌 정착하였고 현재 그 후손은 12호로 마을에서 제일 많은 씨족이다. 이어 김해김씨가 입촌 하여 현재도 그의 후손이 살고 있다. 마을 앞 정자 옆에 조선버드나무라는 500여년 된 고목 3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의 수령과 초초의 입촌 년대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.
옥산리 용촌(龍村)
![옥산리 용촌](/home/hampyeong/images/sub/c19_04.jpg)
마을 형국이 방앗간 같다 하여 방아 '용( )'자를 써서 "용촌( 村)"이라 했는데 후에(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의함) 용계(龍溪)라 하였고 1910년 지적 정리 때 "용촌(龍村)"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. 방아의 확은 확골들이라 하여 6정보 정도가 있다. 이 마을은 380여 년 전에 김해김씨가 정착함으로써 이루어졌고 현재는 그 후손의 6호가 살고 있으며 밀양박씨가 제일 많이 살고 있다.
옥산리 모산(帽山)
![옥산리 모산](/home/hampyeong/images/sub/c19_05.jpg)
1789년 호구총수의 지명에 보면 모읍(毛邑)으로 되어 있는데 이 마을 형국이 사모(紗帽)같다 하여 마을 이름을 "모산(帽山)"으로 표기하고 있다. 총 가구 18호 중 밀양박씨 9호, 남평문씨 3호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. 남평문씨의 입향조는 상주(尙周 1676~1740)로 1700년에 입촌했다.